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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ional Studies

동북아 지역연구: 경제 협력 네트워크와 FTA 추진 현황

by IPI 2025. 5. 26.

동북아 지역은 세계 GDP의 약 25%를 차지하는 거대한 경제권이다. 중국의 급속한 성장과 한국·일본의 기술력, 그리고 이들 간의 긴밀한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는 글로벌 경제에서 이 지역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갈등과 역사 문제로 인해 경제 통합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최근 RCEP 발효와 CPTPP 논의, 그리고 한중일 FTA 협상 등은 동북아 경제 협력의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하고 있다.

RCEP의 출범과 동북아에 미치는 영향

2022년 1월 발효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은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이다. ASEAN 10개국과 한중일 3국, 호주, 뉴질랜드 등 15개국이 참여하여 세계 인구의 30%, GDP의 30%를 차지하는 거대한 경제권을 형성했다. 특히 동북아 3국이 모두 참여한 첫 번째 다자 FTA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RCEP의 가장 큰 특징은 점진적이고 포괄적인 자유화 접근법이다. 관세 철폐율이 91%에 달하지만, 민감 품목에 대해서는 20년간의 장기 철폐 일정을 허용했다. 한국의 경우 쌀을 비롯한 핵심 농산물을 예외로 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개방 수준을 확대했다. 중국과 일본은 각각 86%와 88%의 관세 철폐율을 보여 상당한 양보를 했다.

서비스 분야에서도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을 도입하여 명시적으로 제외되지 않은 모든 서비스가 개방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는 동북아 3국 간 서비스 교역 확대에 중요한 기반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전자상거래, 지적재산권, 정부조달 등 신통상 분야에서도 일정 수준의 규범을 마련했다.

하지만 RCEP의 한계도 분명하다. 인도의 불참으로 원래 구상보다 축소되었고, 노동·환경 기준이나 국영기업 규율 등에서는 TPP에 비해 낮은 수준을 보인다. 특히 한중일 간의 민감한 현안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CPTPP와 동북아 국가들의 딜레마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은 미국의 TPP 탈퇴 이후 일본 주도로 재구성된 고수준 FTA다. 11개국이 참여하는 이 협정은 RCEP보다 훨씬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노동권 보호, 환경 규제, 국영기업 규율, 디지털 통상 등에서 21세기형 통상 규범을 제시한다.

일본은 CPTPP의 핵심 주도국으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고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자유무역과 시장경제 원칙을 강조한다. 이는 일본의 대외경제 전략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한다.

한국의 CPTPP 가입 논의는 복잡한 정치경제적 고려사항을 안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일본, 호주, 캐나다 등과의 FTA 효과를 얻을 수 있고, 글로벌 가치사슬에서의 지위 향상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농업 개방 압력과 높은 수준의 규제 조화 요구는 국내 저항 요인이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제약도 있다.

중국의 CPTPP 가입 신청(2021년 9월)은 역내 경제 질서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중국이 CPTPP의 높은 기준을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국영기업 개혁, 정부보조금 투명성, 노동권 보장 등에서 상당한 제도 개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중국의 가입 신청을 진정성 있는 개혁 의지로 보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전략적 계산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한중일 FTA 협상의 난항

2012년 시작된 한중일 FTA 협상은 동북아 경제 통합의 핵심 사업이지만, 13년째 표류하고 있다. 세계 GDP의 약 25%를 차지하는 3국 간 FTA가 체결된다면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 차이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실질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농업 분야다. 한국과 일본은 쌀을 비롯한 핵심 농산물 보호를 위해 높은 수준의 예외를 요구하고 있다. 중국 역시 농업 대국으로서 자국 농민 보호에 민감하다. 제조업 분야에서도 일본의 기계·전자 산업과 한국의 조선·철강 산업, 중국의 노동집약적 산업 간 경쟁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서비스 분야 개방도 쟁점이다. 일본은 금융·통신·유통 분야에서 높은 개방 수준을 요구하고 있지만, 한국과 중국은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반대로 한국은 건설·엔지니어링 서비스의 진출 확대를 원하지만, 일본과 중국의 호응은 제한적이다.

무엇보다 정치적 요인이 협상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 독도·센카쿠 영토 분쟁, 역사 교과서 문제, 위안부·강제징용 이슈 등이 경제 협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2년 일본의 센카쿠 국유화 조치 이후 한중일 정상회의가 중단되면서 FTA 협상도 동력을 잃었다. 최근에는 중국의 사드 보복, 일본의 수출규제 등이 새로운 갈등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양자 FTA 네트워크의 확산

다자 FTA의 한계로 인해 동북아에서는 양자 FTA가 더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한국은 현재 58개국과 FTA를 체결하여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FTA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중국 역시 26개국과 FTA를 맺으며 경제외교를 적극 전개하고 있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최근 들어 FTA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한미 FTA(2012년), 한EU FTA(2011년) 등 주요 선진국과의 협정을 통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의 지위를 강화했다. 신남방정책의 일환으로 아세안, 인도와의 협력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이웃 국가인 중국, 일본과는 양자 FTA가 없는 상황이다.

중국은 일대일로 구상과 연계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FTA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있다. 특히 ASEAN과의 FTA 업그레이드를 통해 동남아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대륙자유무역지대(AfCFTA)와의 연계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TPP 주도와 함께 양자 FTA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일EU 경제동반자협정(EPA), 일영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등을 통해 선진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으로 인도, 호주와의 경제 협력도 확대하고 있다.

디지털 경제와 새로운 협력 동력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 팬데믹은 디지털 경제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전자상거래, 디지털 플랫폼, 핀테크, 블록체인 등 신기술 분야에서 동북아 국가들 간 협력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의 협력을 넘어서는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한국은 K-POP, 드라마 등 한류 콘텐츠와 IT 기술을 결합한 디지털 한류로 글로벌 시장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중국은 알리바바, 텐센트 등 플랫폼 기업들을 통해 동남아와 아프리카 시장으로 진출하고 있다. 일본은 소프트뱅크의 투자 네트워크와 로봇, AI 기술을 바탕으로 디지털 전환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경제 분야에서도 경쟁과 갈등이 존재한다. 데이터 현지화, 플랫폼 규제, 디지털세 등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특히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반도체, 5G, AI 등 핵심 기술 분야에서 공급망 분리(디커플링) 압력이 커지고 있다.

공급망 안정성과 경제 안보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효율성만을 추구해온 적시생산(Just-in-Time) 시스템의 한계가 노출되면서 공급망 안정성과 다변화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이는 동북아 경제 협력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등 핵심 소재·부품 분야에서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은 중국에 대한 중간재 의존도가 높고, 일본은 핵심 소재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중국은 희토류와 가공 능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이러한 상호의존 구조가 때로는 경제적 무기로 활용되기도 한다.

미국의 '프렌드쇼링(friend-shoring)' 정책과 EU의 '전략적 자율성' 추구는 동북아 공급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권위주의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이다. 이는 한중일 간 경제 관계에도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그린뉴딜과 탄소중립 협력

기후변화 대응과 탄소중립 목표는 동북아 경제 협력의 새로운 영역을 열고 있다. 한국의 그린뉴딜, 중국의 탄소 피크·탄소 중립(30·60) 목표, 일본의 그린성장 전략 등이 맞물리면서 녹색 기술과 산업에서의 협력 잠재력이 커지고 있다.

재생에너지, 수소 경제, 전기차, 이차전지 등 녹색 산업 분야에서 3국 간 기술 협력과 시장 확대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해상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분야에서는 한국의 조선 기술, 중국의 제조 능력, 일본의 핵심 소재 기술이 상호 보완적이다.

하지만 탄소국경조정메커니즘(CBAM) 같은 새로운 무역 규제도 등장하고 있다. EU가 2026년부터 탄소 집약적 제품에 대해 추가 관세를 부과하기로 하면서 동북아 제조업체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3국 간 공동 대응 방안 모색도 필요한 상황이다.

금융 협력과 통화 스와프

아시아 금융위기(1997년)와 글로벌 금융위기(2008년)를 겪으면서 동북아 금융 협력의 필요성이 커졌다.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를 통한 양자 통화스와프 체결과 다자화(CMIM) 추진이 대표적 성과다. 현재 2,400억 달러 규모의 다자 통화스와프 풀이 운영되고 있다.

한중일 3국은 각각 CMIM의 주요 기여국이면서 수혜국이기도 하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한중, 한일 간 통화스와프가 유동성 위기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통화스와프가 중단되거나 축소되는 경우도 있어 경제와 정치의 분리 필요성이 제기된다.

아시아채권시장발전이니셔티브(ABMI)를 통한 역내 채권시장 육성도 진행되고 있다. 현지통화 표시 채권 발행 확대와 신용보증·투자기금(CGIF) 운영을 통해 달러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여전히 역내 금융시장의 통합 수준은 유럽에 비해 낮은 상황이다.

인프라 연결성과 지역 통합

물리적 인프라 연결성은 경제 통합의 기초다. 동북아에서는 철도, 항만, 전력망, 통신망 등의 연결을 통해 역내 교역과 투자를 촉진하려는 구상들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 분단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진전이 제한적이다.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은 동북아를 넘어 유라시아 전체를 연결하는 거대한 인프라 프로젝트다. 중몽러 경제회랑, 신유라시아 대륙교 등을 통해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육상 실크로드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도 신북방정책을 통해 이러한 연결성 확대에 참여하려 하지만, 북한 문제가 걸림돌이다.

일본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을 통해 해상 연결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고품질 인프라 수출과 해상교통로(SLOC) 안전 확보를 강조한다. 이는 중국의 일대일로와는 다른 접근법으로, 역내 연결성 구상에서도 미중 경쟁 구도가 나타나고 있다.

역내 투자와 기업 활동

동북아 역내 투자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한국과 일본 기업들의 대중 투자가 급증했고, 최근에는 중국 기업들의 해외 투자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투자 흐름은 역내 가치사슬 형성과 기술 이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투자 환경도 변화하고 있다. 중국의 산업 고도화와 임금 상승으로 한국과 일본 제조업체들의 중국 투자 매력도가 감소하고 있다. 대신 베트남, 인도 등으로 투자처를 다변화하는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이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와 미중 갈등은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의 해외 투자도 제약을 받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중국 기업에 대한 투자 심사가 강화되면서 첨단 기술 분야 투자가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중국 기업들로 하여금 한국, 동남아 등 대안 시장을 모색하게 만들고 있다.

경제 협력의 정치화와 탈정치화

동북아 경제 협력의 가장 큰 도전은 정치적 갈등의 경제적 파급효과다. 독도·센카쿠 영토 분쟁, 역사 인식 차이, 군사적 긴장 등이 경제 관계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9년 한일 무역분쟁, 2017년 한한령(한류 금지령)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정치화 현상은 동북아 경제 통합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유럽 통합 과정에서 경제 협력이 정치적 화해를 이끌어낸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북아에서는 오히려 경제가 정치적 갈등의 무기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동시에 탈정치화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민간 차원의 경제 교류와 기업 간 협력은 정치적 갈등과 무관하게 확대되고 있다. 실무진 차원의 경제 대화도 정치적 갈등 시기에도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이중 구조가 동북아 경제 관계의 특징이다.

결론

동북아 경제 협력 네트워크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RCEP 발효로 역내 3국이 처음으로 공통 FTA 틀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한중일 FTA는 여전히 표류 중이다. CPTPP를 둘러싼 각국의 전략적 계산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디지털 경제, 그린뉴딜, 공급망 안정성 등 새로운 협력 동력이 등장하고 있지만, 미중 경쟁과 정치적 갈등은 여전히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경제 안보 개념의 확산으로 경제와 안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상호의존성은 계속 심화되고 있으며, 민간 차원의 협력은 정치적 갈등을 넘어서고 있다. 앞으로 동북아 경제 협력이 정치적 제약을 극복하고 진정한 지역 통합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가 중요한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의 선순환 구조 구축과 함께 실용적이고 점진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